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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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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 

올해는 많은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술계의 큰 빛 중 하나인 류이치 사카모토가 별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박서보 화백의 별세 소식은 마음 아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박 화백은 지난 2월에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서 "평생 담배를 피우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나서야 담배를 끊었다"라며 "나이가 92세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시간을 선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박 화백을 '지칠 줄 모르는 예술가'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소셜 미디어를 살펴보면 최근까지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작업을 하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 화백의 재단 관계자는 그의 별세가 "너무 갑작스러운 운명"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박 화백은 1957년에 한국에서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 '회화 No.1'을 창작한 화가로, 한국 단색화 예술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른 후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로 그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 화백은 이 작품의 시리즈에 '묘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초기 묘법 시리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후기 묘법은 1982년에 박 화백이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묘법과 마찬가지로 연필로 선을 그는 방식이지만, 한지의 흡수성을 이용하여 안료가 한지 속으로 스며들고 박 화백의 반복적인 행위가 작품에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2015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은 2015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개최된 '단색화'전시를 통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작품 가치가 급상승했습니다.

박 화백은 1931년 11월에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으며, 1950년에 홍익대 미술과에 입학했습니다. 1958년에 결혼하고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1962년부터 홍익대 미대에서 강사로 시작하여 1997년까지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박서보 미술관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내년 여름쯤 개장할 예정입니다. 박 화백은 생전에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내면의 감정을 해방하고 치유받아서 돌아가길 바란다"고 희망했습니다.


박 화백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갤러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2021년 국제갤러리에서 개최된 박서보 화백의 전시를 기억합니다. 그 전시에서 나타난 화려한 네온 색상과 정갈한 묘법은 매력적이었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통해 미술에 대한 관심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출발이 정말로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박서보 화백의 작품에 몰두했으며, 이로 인해 단색화 화풍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습니다. 박서보의 단색화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감과 단정한 형태로 매혹적이었습니다. 규칙과 반복 속에서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찾아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기지 재단을 방문하고, 조현화랑에서 개최되는 전시에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조현화랑에서 열릴 전시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그 전시가 박서보 화백의 마지막 개인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감이 현실로 변해버린 것은 정말로 슬픕니다. 박서보 화백은 폐암 3기로 고백하면서도 예술 활동을 지속했고, 개인전 및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 의지와 열정은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가 겪었을 고통과 어려움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팬으로서는 그의 작품을 더 많이 감상하길 원했습니다.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박서보 화백이 남긴 작품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감상하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이 너무 아쉽고 슬프네요...

한국의 모노크롬 예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없는 곳에서 추상미술을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후배들에게 남긴 유산은 작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의 작품을 구축한 과정은 심층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로 그의 저항 정신은 놀랍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작품을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反國展(반국전)"의 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모든 작품이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느껴지는 이 감각, 이것이 진정한 예술인가?

이것은 사진의 제약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사진은 마치 한 사람이 찍은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로는 수행적인 그림 그리기입니다.



그의 미술 기법은 스님들의 수행과 같이 무한한 "선"을 그리면서 발전했습니다. "깨닫음"을 얻을 때까지 "선"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고 돈오도 찾아오며 성취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자와 장자를 읽고 다시 읽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견성을 위해 수행적으로 "선"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바깥 세계가 아니라 내면 세계를 향합니다.

예술은 결국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