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벤 허버드
들어가는 말
아랍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젊은 왕자가 연설할 때쯤 세계에서 모여든 투자자들과 거부들이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는데,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우디를 국제 해운의 허브로 만들 것입니다. 2,200만 국민을 위해 종교적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놀이공원과 영화관과 콘서트장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대폭 확대할 것이고, 그동안 방치했던 유적지를 개발하고 홍해에 세계적 수준의 생태 리조트를 조성함으로써 관광업 붐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변화가 진짜인지 의심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도록 그동안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던 규정을 바꿀 것입니다. 2018년 6월부터는 마침내 여성이 운전을 시작할 것입니다.”
사우디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라는 일 중독자이자 왕의 아들이었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빠른 시간 안에 사우디뿐 아니라, 나아가 중동 전체를 재조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고로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정상에 서고 싶어 하는 수천 명의 왕자를 제치고 선두에 나서기까지 3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15년 연로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는 국왕에 오른 후 아들들에게 사우디의 가장 중요한 분야인 국방, 경제, 종교, 석유를 담당하도록 맡겼다.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사촌 형들을 제치고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 비록 부왕이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기는 했지만, 무함마드 왕자가 국가의 감독자이자 경영 책임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 그를 다른 왕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우디 안에서뿐 아니라 사우디 밖에서도 MBS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던 날로부터 2주 후, 가혹한 일이 벌어졌다. 며칠 동안 왕실 요원들과 비밀경찰이 사우디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 수백 명을 검거했는데, 그중에는 MBS의 친척도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결혼식에 참석한 인사도 있었다. 요원들은 검거된 인사들의 수행원과 운전기사를 돌려보내고 휴대전화를 압수한 후 그들을 리츠칼튼 호텔에 감금했다. 호화로운 투자 회의장이 오성급 감옥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 인사들을 구금한 것을 부패 단속의 결과라고 발표하자 국민이 환영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왕자와 사업가들이 노다지 같은 계약을 체결하거나 정부 금고에서 재산을 빼돌리는 것을 지켜봤고, 그곳에 구금된 인사 중 몇몇은 그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
하지만 살만 국왕의 가까운 인척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구금되지 않자 단속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체포가 이루어지는 동안 수사를 담당하는 위원회가 발표되었는데, MBS가 주도한 그 위원회는 MBS의 재산에 대해서는 조사한 일이 없었다. 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5억 달러나 쓰지 않았는가?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이라고 거론된 바 있는 프랑스에 있는 그의 성은 어떻게 된 일일까?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되어 있던 인사들이 국왕의 손님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대하는 모습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MBS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MBS는 사이코예요. 그는 악마 정도가 아니에요. 악마조차 그에게 배운단 말입니다” 그들은 MBS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우디의 수도를 장악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모든 사람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과 몇 년 만에 MBS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눈길을 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날 때부터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시간 대부분은 훨씬 더 부유하고 경험이 많은 왕자들 사이에 끼어 존재감조차 없었고 서열도 형편없었다.
아무튼 MBS는 매우 분열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게임체인저로 추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를 잔인한 독재자로 여겼다. 그가 발표한 모든 계획은 충성스러운 그의 후원자들과 언론인들에 의해 절묘한 작품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감춰져 있다. 체포가 일상화되면서 시중에서는 그의 배경이나 그가 세운 계획의 타당성이나 그가 발표한 계획을 달성할 능력이 있는지 거론하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사회 규제가 느슨해지고 여성들이 그들의 어머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직업을 얻게 되면서 열정이 넘쳐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게시물이나 댓글 때문에 체포되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통화를 기피하고 만날 때 휴대전화를 치워놓기도 했다. 2017년 말에 투자 회의에 참석해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리츠칼튼 호텔에 많은 사람을 가두어 둔 것과 같은 서로 상반된 2가지 모습이 MBS의 실체였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젊은 왕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나라를 변화시키고, 경제와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확대하고,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등 대단한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체포와 검거 등의 사건도 묘사되어, 그의 통치에 대한 의문과 갈등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MBS의 인격과 통치 방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실체와 사회의 변화, 국민의 반응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도착
2013년 사우디를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나는 왕실 내막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중동 지역에서 7년 동안 근무한 후 최근에 《뉴욕 타임스》 중동 특파원으로 고용되었다. 나는 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와 리비아뿐 아니라 어디서든 필요한 곳에서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움직임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우디는 블랙홀과 같았다. 똑같은 흰색 전통복을 입고, 이름도 순서만 다를 뿐 그 이름이 그 이름이고, 사회는 불투명하고, 글자로 된 것 대부분은 이슬람 종주국과 관련된 것이고, 여성이 천대받았다. 나는 아랍 사람들이 사우디를 비난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은 사우디에서 특정한 정치적 조류가 부상하는 것이나,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부추기고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보수주의가 확산하는 것과 같은 병폐를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중동 지역에 미치는 사우디의 영향력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이후 5년 동안 내 임무는 그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사우디를 수십 번 방문하고 각 지역을 돌아보는 동안 각계각층의 사우디 사람 수백 명을 만났고 그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사우디를 지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부터 탈출을 갈망하는 젊은이, 자기가 가진 특권의 의미를 망각한 왕자와 공주, 운전하고 싶은 여성, 운전에 관심 없는 여성, 그리고 비록 사회가 조금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사우디 국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까지. 그 시간 동안 나는 사우디의 정치와 외교정책과 문화와 종교를 파헤쳐 가며 수백 편의 기사를 작성했다.
도착한 후, 당신은 2013년에 처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고, 사우디의 왕실 내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7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었지만, 사우디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후 《뉴욕 타임스》의 중동 특파원으로 고용되어 사우디의 움직임과 정체성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우디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수십 번을 넘는 방문을 했으며, 다양한 사우디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성직자부터 젊은 탈출을 꿈꾸는 이들, 특권을 누리는 왕자와 공주들, 운전을 바라는 여성들, 그리고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만났습니다. 사우디의 정치, 외교, 문화, 종교 등을 파헤치며 수백 편의 기사를 작성하면서 사우디의 복잡한 실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사우디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습니다.
즉위
2015년 1월 23일, 압둘라 국왕은 오랜 폐암 투병 끝에 리야드의 국가방위군병원에서 사망했다. 국왕의 아들 중 하나가 병실에서 나와 국왕 일가와 각료들에게 국왕의 사망을 알렸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방계가족의 왕자들이 조문을 다녀갔는데, 그중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을 대동한 살만 왕자도 있었다. 어느 시점엔가 젊은 왕자가 왕실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을 압둘라 국왕 내각의 실세에게서 넘겨받았는데, 이로써 권력이 누구에게로 넘어가는지 분명해졌다. 압둘라 국왕을 병원으로 옮겼던 왕실 경호원들은 살만을 호위해 병원을 떠났고, 살만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살만은 79세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살아남은 아들 중 거의 끄트머리였고 자기 세대 중 국왕에 오른 마지막 왕자였다. 새로운 국왕이 즉위해 사우디가 환호로 뒤덮이고 TV 방송에 축하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녹색 불꽃이 리야드 밤하늘을 수놓았지만, 당시는 사우디에 고난의 시기였다.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민중 봉기로 튀니지와 예멘과 리비아와 이집트의 독재 권력이 무너지자 사우디에게 익숙했던 지역 질서가 흔들렸다. 이러한 봉기로 인해 각 국가에서 누가 권력을 휘두를 것이며 사우디와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불투명해졌다.
사우디를 등에 업은 새로운 독재자가 이집트를 장악했지만, 이집트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포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비아는 권력을 잡으려는 두 세력의 충돌로 혼란에 빠졌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와 사우디 국경 지역인 예멘 북서부를 장악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시리아에서는 사우디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바샤르 알 아시드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실패하자 잔인한 내전으로 번졌다. 그때 이슬람국가(IS)의 지하디스트들은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서부를 휩쓸어 영국 크기의 영토를 점령하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세계 무슬림을 통합하기 위해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정부를 수립했다고 선언했다. 사실 사우디 왕실을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무슬림은 지하디스트를 혐오했고, 그래서 그들이 부상하는 것이 사우디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그 당시 이란은 이 지역의 혼란을 틈타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와 예멘의 민병대를 비밀리에 지원해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참고로 사우디와 이란은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의 대표로서 경쟁하는 사이였다. 수니파 왕국인 사우디는 스스로를 세계 무슬림의 바티칸으로 여겼고 이란의 시아파 신앙을 일탈이라고 무시했다. 반면 시아파 혁명정부가 통치하는 이란은 사우디를 ‘혁명을 수출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훼손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하는 첫째가는 적으로 보았다.
이런 정세 속에서 살만은 MBS를 이끌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까지는 관측통조차도 젊은 왕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살만은 압둘라 국왕이 부왕세제로 책봉했던 이복동생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를 왕세제로 승격시켜 왕실 서열을 정비했다. 이어서 살만은 조카이자 알카에다 격퇴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 내무부 장관을 왕위 계승 서열 두 번째인 부왕세자로 책봉했다. 이로써 MBN은 압둘아지즈 국왕의 손자로서는 첫 번째로 왕위 계승 서열에 이름을 올렸다.
살만은 MBS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 군을 통솔하게 했으며, 동시에 국왕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국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안과 왕실 자금을 관리하게 했다. MBS는 두 지위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키웠다. 이후 국왕은 왕세제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면서 무끄린을 왕세제에서 폐위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안보 당국의 수장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MBN이 그동안 안보와 관련해서 미국과 의견을 조율해 왔고 중앙정보국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워싱턴에서는 이러한 조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MBS도 따라서 승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부왕세자로 책봉하고, 사우디 경제의 중추인 사우디 아람코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해 이를 지휘하게 했다.
2015년 1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이 오랜 폐암 투병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의 과정이 시작되었고, 국왕의 아들 중 한 명이 병실에서 국왕의 사망을 알리며 새로운 국왕이 되었습니다. 이 국왕은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었으며, 그의 즉위는 권력의 이전과 민중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살만은 이미 나이가 79세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건국자인 압둘아지즈 국왕의 남아있는 아들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속했으며 그의 세대 중에서 국왕에 오른 마지막 왕자였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민중 봉기로 인해 중동 지역이 혼란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이 봉기는 튀니지, 예멘, 리비아, 이집트와 같은 국가들에서 독재적인 권력이 무너지는 등 사우디에게 익숙한 지역적 질서를 흔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만은 MBS를 이끌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MBS는 그간 국방부 장관으로서 군을 통솔하며 세력을 쌓아왔습니다. 또한 국왕 비서실장으로서 왕실의 사안과 자금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MBS는 부왕세자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이후 국왕은 그의 요청에 따라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를 왕세제에서 폐위하고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를 왕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MBS는 경제의 중추인 사우디 아람코 이사회 의장으로서 사우디 경제의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우디의 정치와 경제, 외교 등의 영역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은 사우디 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중동의 변화와 지역적 영향력 재배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웅대한 비전
MBS가 사우디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공식화하면서 그는 변화를 반대하고 나설 성직자들의 마음을 돌릴 뿐 아니라 재건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경영 컨설턴트들을 찾기 시작했다. 사우디가 현금을 풀기 시작하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외국 전문가들이 경제 다각화를 비롯해 군비 조달 효율화와 교육 과정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대해 조언하겠다며 몰려들었다. MBS는 같은 일을 여러 회사에 맡겨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경쟁사가 보는 앞에서 결과를 발표하게 만들어 아이디어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사우디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MBS의 웅대한 계획이 발표를 앞두게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컨설턴트들이 모든 단계에서 관여했고, 맥킨지가 주도하는 싱크탱크는 사우디가 당면한 도전을 진단하고 이것을 해결할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마치 이들이 고려하고 있는 여러 대안에 대한 국민 반응을 떠보기 위해 풍선을 띄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사우디 당국자들이나 현지 언론이 맥킨지가 마련한 MBS의 미래 로드맵인 국가개조계획(NTP)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발표를 여러 차례나 미뤄야 했던 MBS는 경쟁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을 선정하고, 그가 제안한 국가개조계획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비전 2030’이었다.
‘비전 2030’이라는 사우디의 웅대한 비전은 비록 외국 컨설턴트들이 작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발표되는 순간에는 이미 MBS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 계획을 발표한 날 그는 여러 TV쇼에 나와서 ‘비전 2030’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숫자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단지 사우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우디는 그동안 ‘석유 중독’으로 발전이 지체되었지만 그 시절은 곧 끝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MBS의 사우디 재건 비전은 비록 외부의 전문가들이 작성한 것이었지만, 그가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우디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사우디의 경제 다각화와 군비 효율화, 교육 과정 재구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과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2016년, 사우디의 미래를 준비하는 웅대한 계획 '비전 2030'이 발표되면서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이 계획은 외국의 컨설턴트들과 협력하여 마련되었지만, MBS의 지도하에 사우디의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비전 2030'에는 엄청난 숫자와 목표가 담겨 있었으며, 이것이 사우디의 미래 비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MBS는 '비전 2030'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여러 TV 쇼에 등장하며 그 안에 담긴 엄청난 숫자와 전략을 전파했습니다. 이 계획이 단지 사우디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사우디의 석유 중심 발전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사우디의 기존 이미지를 깨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역할을 제시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비전 2030'은 사우디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과 발전을 지향하는 목표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비전은 사우디의 미래를 준비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그것은 MBS가 사우디를 지도하는 동안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사우디의 관심을 한층 더 끌고,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계획이 되었으며, 이로써 사우디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도전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저널리즘의 역할
MBS는 그의 비전을 선포하고 난 후 사우디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초청해 비공개 리셉션을 열었다. 그는 두 그룹을 초청했는데, 하나는 젊은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그들은 케케묵고 나이 든 성직자들과는 달랐는데, 그들은 새로운 문물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마치 할리우드 스타들이 서구 젊은이들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그들도 많은 사우디 젊은이를 몰고 다녔다. 그들이 초청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트위터나 스냅챗 같은 소셜 미디어의 팔로어 수가 수백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즉 MBS는 ‘비전 2030’을 그들보다 더 빨리 안착시킬 수 있는 그룹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그룹은 국내외 현안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견해와 지도자들의 견해를 보도해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몇 년 전에 미국 외교관에게 앞으로 군주정치체제가 직면해야 할 문제에 대해 설명했던 자말 카슈끄지라는 언론인이 있었다. 그는 사우디에서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 그 누구보다 MBS의 거취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되었다.
살만 국왕이 즉위한 후 카슈끄지는 국왕을 강력한 지도자라고 칭송한 후에 아랍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신임 국왕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살만 독트린’이라는 칼럼에서 이란의 위협을 인정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의 견해는 때때로 온라인에서 공격받았지만, 그는 자기 견해를 고수했고 사우디 정부가 공개 토론을 허용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런 카슈끄지가 2016년 MBS가 개최한 성직자 지식인 회의에 초대된 것은 그가 중요하게 대접받는 인물이라는 것과, 동시에 사우디의 떠오르는 새 지도자가 그를 꺾어야 할 상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MBS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경제계획을 설명하고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또 수단과 파키스탄과 지부티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저널리즘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MBS의 비전을 선포한 후에 그가 주요 인물들을 초청하여 비공개 리셉션을 열었던 상황은 저널리즘이 사회의 다양한 성격과 관점을 대변하고,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성직자 그룹: MBS가 초청한 젊은 성직자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수많은 팔로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사우디 사회의 변화를 더욱 신속하게 전파하고, '비전 2030'을 효과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초청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사회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들의 반응과 지지는 사우디 사회의 흐름을 크게 좌우할 수 있습니다.
- 지식인과 언론인 그룹: 이 그룹은 국내외 현안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견해와 지도자들의 견해를 보도해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자말 카슈끄지와 같이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MBS의 정치적 거침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저널리스트들은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고, 사우디 사회에서 공개 토론을 가능하게 한 MBS의 조치에 대한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대한 폭넓은 토론을 장려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저널리즘이 사회적인 변화와 의사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고, 또한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뉴스와 의견은 사회에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관점을 대변하며, 의사결정과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두 무함마드
MBS는 왕실 행사나 미국 당국자들과 갖는 회담 같은 공개적인 행사에서는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사촌 형을 예의를 갖춰 대했다. 사촌 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 왕세자가 말하는 동안 그는 왕세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세로 종종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왕세자의 뒤에 서 있었다. 사우디 당국자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두 무함마드’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MBS가 MBN을 존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MBS가 자기 사촌 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MBS는 MBN을 조금씩 무장 해제시켜 나갔다.
MBN은 수년 동안 인공지능 박사 학위를 받은 언어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사드 알 자브리 박사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알 자브리 박사는 내무부 안에서 승진해 장성급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미국 당국자들에게 왕자가 다루는 다양한 현안에 대한 ‘해결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왕세자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데다가 외향적이기까지 해서 미국 당국자들과 자주 만나 알카에다의 위협이나 이란의 움직임,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논했다.
2015년 9월 MBN과 알자브리 박사가 함께 일하고 있는데, TV에 국왕이 알자브리 박사를 해고했다는 속보가 나왔다. 누구도 그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고 달리 저항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알 자브리 박사는 짐을 꾸려 내무부를 떠났다. MBN은 그렇게 가장 신뢰했던 조력자를 잃었다. 몇 달 후, MBS는 첫 번째 기자회견을 열었다. MBS에게 호의적인 사우디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테러에 대항하는 이슬람 국가들의 국제 동맹에 대한 MBS의 새로운 계획에 대해 질문했다. MBS는 이 동맹에 34개 회원국이 가입했으며 다른 회원국들도 곧 가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슬람 세계의 전체 지역이나 일부 지역에서 수행하는 대테러 작전을 조정하고 지원하기 위한’ 작전 본부를 리야드에 설치하겠다고 말했다. 중동 지역과 미국에서 사우디를 주목하고 있던 관계자들은 이 발표가 자기 사촌 형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알려진 대테러 작전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MBS의 계획이라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MBS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해 MBN은 큰 내상을 입었고, 그래서 강한 진통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보고서에서는 그가 여장을 즐기고 동성애를 선호하는 문제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MBN이 국왕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아랍에미리트의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MBZ)를 포함한 다른 걸프 왕족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MBZ는 한쪽으로는 MBN의 문제점을 흘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우디의 미래인 MBS를 자기 품 안에 두려고 했다.
2016년 초, MBN은 사우디를 떠나 알제리에 있는 그의 가족 별장으로 향했다. 그의 가족 별장은 알제리 수도인 알제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그는 휴가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 국장을 비롯해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워싱턴 인사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예멘 전쟁이 격화되고 이슬람국가(IS)의 지하디스트들이 사우디 목표물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위중한 시기에 안보 기구의 수장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수의 미국 당국자는 그가 국왕에 오르는 길이 위태로워졌다고 느끼고 MBS와의 마찰을 피해 도망친 것으로 추정했다. MBN이 물러서자 MBS가 나섰다. 2016년 3월 미국 의회 사절단이 리야드를 방문했을 때, MBS는 왕실 예복을 입고 나타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을 매혹시켰다.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와 무함마드 빈 살만(MBS) 사이의 관계와 MBN의 정치적 현상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상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 MBS와 MBN의 관계: 처음에는 MBS가 MBN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왕세자인 MBN이 행사나 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때도 MBS는 MBN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MBS는 MBN을 조금씩 무장 해제시켜 나갔으며, 사우디의 정치 장면에서 MBN의 영향력을 점차 제한하고자 했습니다.
- 알자브리 박사와 MBN의 관계: MBN은 사우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인공지능 박사 학위를 받은 언어학자인 사드 알 자브리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알 자브리는 외국과의 협력,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담당했으며, MBN의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로 간주되었습니다.
- MBN의 갑작스런 해고: 알 자브리 박사가 해고된 사건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며, MBN은 그를 잃음으로써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MBN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으며, MBS는 이와 같은 상황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 MBN의 알제리로의 피난: MBN은 MBS의 압박으로 인해 큰 내상을 입고, 알제리에 있는 가족 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가족 별장은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MBN은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 MBS가 사우디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왕실의 정치적 동향과 내부적인 갈등에 대한 흥미로운 단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배신
2017년 6월 중순, MBS는 2015년에 해고된 MBN의 전 비서실장 사드 알 자브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우디로 돌아오면 새로운 일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해 초 사우디를 떠난 알 자브리는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피하고 싶기도 했고 MBS를 믿을 수도 없어서 치료를 핑계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또 MBN의 보좌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즉 젊은 왕자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그가 옳았다. 6월 20일 밤, 많은 왕족이 이슬람 전통에 따라 라마단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위해 메카로 모여들었다. MBN이 위원장으로 있는 정치안보협의회는 금식이 끝나고 저녁 기도를 드린 후에 회의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MBN에게 국왕이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그는 헬기를 타고 국왕이 머무는 사파 궁으로 날아갔고, 경호원과 함께 국왕에게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왕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그들에게서 총과 휴대전화를 빼앗고 MBN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그는 MBS의 보좌관들에게 왕세자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MBN이 왕세자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압박은 강도를 더해갔다. 그를 가둔 요원들은 그를 마약중독자라고 모욕하고 문제가 있는 그의 의료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왕세자를 밀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왕세자가 되었을 때 왕실 인사들과 최고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이슬람 초기부터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식이었다. 그 충성 맹세는 일반적으로 죽거나 퇴위할 때만 깨질 수 있는 것인데, MBS의 보좌관들이 무력으로 이를 깨려고 한 것이다. 그날 밤 MBN이 궁에 갇혀 통신이 두절된 사이 왕실 관계자들은 왕위 계승 절차를 결정하는 충성위원회 위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국왕이 MBS를 왕세자로 세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동의하는지 물었다. 위원 대부분은 국왕의 뜻에 반대하는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했고, 최종적으로 위원 34명 중 31명이 이에 동의했다. 왕실 관계자들은 얼마나 많은 왕실 인사가 그에게 등을 돌렸는지 알려주면서 MBN을 압박하기 위해 그날 밤 녹음한 통화 내용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밤이 깊어 가는 데도 MBN을 가둔 요원들이 그에게 음식도 주지 않고 당뇨병 약도 주지 않자 그는 지쳐가기 시작했다. 아마 새벽쯤 항복하고 자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그 일이 끝나자 그를 옆방으로 안내했는데, 놀랍게도 그 방에는 경호원들과 카메라를 든 요원들과 함께 MBS가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왕자(MBS)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무릎을 꿇어 겉옷 자락에도 입을 맞추며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MBN은 사우디의 새 왕세자에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충성을 맹세했다. MBS는 “우리는 당신이 지시한 것과 조언한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MBN은 “행운을 빕니다. 알라가 함께 하기를”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 MBN은 내무부 장관에서도 해임되었고, 그 자리에는 MBN의 조카가 임명되었는데, 그는 MBS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무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대테러 업무와 보안 업무는 내무부 관할에서 신설된 MBS 직속 기관으로 이전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내에서의 왕실 내부 갈등과 정치적인 배신의 복잡한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MBS의 제안과 알 자브리의 거절: 2017년 6월 중순, MBS는 MBN의 전 비서실장인 사드 알 자브리에게 사우디로 돌아오면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알 자브리는 MBS를 믿지 않고 치료를 핑계로 제안을 거절하고 MBN의 보좌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 MBN의 국왕과의 만남: 이슬람 전통에 따라 라마단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위해 많은 왕족이 메카로 모였는데, MBN은 이날 정치안보협의회의 위원장으로 회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의 시작 전에 국왕이 MBN을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 MBN의 갑작스런 구금: 국왕과의 만남을 위해 사파 궁으로 가던 중 MBN은 경호원들에게 총과 휴대전화를 빼앗기고 구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MBS의 보좌관들에게 왕세자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 왕위 계승 절차의 변화: 왕실 관계자들은 왕위 계승 절차를 결정하는 충성위원회 위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국왕이 MBS를 왕세자로 세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동의하는지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위원이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 MBS의 인사와 역할 변화: MBN이 구금된 후 MBS의 인사와 역할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MBN의 보좌관들은 해임되었고, 내무부의 일부 기능은 MBS의 측근이 담당하도록 변경되었습니다.
사우디 왕실 내부의 힘의 변화와 배신, 권력 구조의 변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 정치적인 움직임이 외부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관련된 정치 이슈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저널리스트
MBS는 ‘비전 2030’을 출범시킨 후 기자들에게 여러분은 기자이니 필요하다고 느끼는 대로 기사를 쓰라고 말했고, 자말 카슈끄지는 MBS의 말을 명령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따랐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사우디 정부의 정책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수위를 한껏 낮춘 비평을 가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MBS가 지향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그는 ‘비전 2030’이 출범하기도 전인 2015년에 내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자기는 경제 다각화를 추구하고, 사우디 젊은이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사회적 규제를 완화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몇 년 전부터 그런 변화를 촉구해 왔다. 그렇지만 그는 MBS가 정작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국민의 의견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한편 카슈끄지는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신문에 여러 칼럼을 발표했고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그런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는 트위터에서 트럼프의 스타일을 비판했고, 워싱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는 사우디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후보일 때와 다르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사우디가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 때문에 놀라고 그들에게 모욕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비판적인 견해는 리야드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트럼프가 승리한 지 몇 주 후, 사우드 알 카타니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MBS의 보좌관이 카슈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트위터에 글을 올리거나 기사를 쓰거나 언론에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사우디 언론인들도 그를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야드를 방문한 후 카슈끄지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우디 뉴스 매체와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저명인사들은 MBS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것을 찬양하고 카타르 봉쇄 결정을 높이 평가했다. 다른 사우디 언론인들도 이 대열에 곧 동참할 것으로 보였는데, 그들은 모두 카슈끄지만큼이나 인지도가 높은 이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벌이는 찬반양론을 마땅치 않게 여겨 거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거기에 어울리지 않으면 여행을 금지당할 수도 있고 국내에 머물다 보면 체포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그는 곧 미국으로 떠났다.
저널리스트인 자말 카슈끄지와 그의 사우디 아라비아 내의 경험과 관점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집니다. 카슈끄지는 MBS(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의 "비전 2030"을 지지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그것이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의 트럼프 대통령 선거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표명했고, 이에 사우디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카슈끄지의 비판적인 견해가 나타나면서 사우디에서의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MBS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에 대한 찬양이 늘어났고, 카타르에 대한 봉쇄 결정 등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습니다. 카슈끄지와 같이 인지도가 높은 다른 사우디 언론인들도 이런 상황을 겪었는데, 카슈끄지는 이들의 논조와 입장에 끼어들지 않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 일하는 카슈끄지의 친구들은 그가 사우디에 머물다 보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카슈끄지는 결국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인 경계, 그리고 지도자의 정책에 대한 의견의 다양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개인적인 비판이 정치적인 압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카슈끄지 실종 사건
망명 생활은 카슈끄지의 삶에서 많은 기쁨을 빼앗아 갔다. 그가 충성을 바쳤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익숙한 음식을 이제는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 넷을 낳았다. 그는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중 한 여인과는 두 번 결혼했다.
어쨌든 워싱턴으로 탈출하기 전에 그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인 알라 나시프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우디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정부를 계속 비판하자, 그녀는 가족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녀가 짐작했던 일이 일어났다. 성인이 된 아들 살레가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에 나갔다가 출국 금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카슈끄지가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쓴 이후 그와 이혼하겠다고 신청한 나시프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카슈끄지는 이스탄불에서 열린 회의에서 36세의 튀르키예 연구원을 만났다. 하티스 첸기즈라는 빵집을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의 다섯 남매 중 둘째였다. 첸기즈는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고, 취재기자가 되고 싶어 했다. 또 걸프 지역을 연구하는 학자인 그녀는 카슈끄지의 글을 탐독했고, 회의에서 직접 그의 강연을 들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후 그녀는 그를 만나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중에 인터뷰 기사를 싣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들은 7월에 그가 이스탄불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났다. 카슈끄지가 첸키즈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며 자기는 지금 불행하고 그래서 자기 삶에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그들의 만남은 빠르게 사적인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함께하는 삶을 상상했다. 그리고 금요일인 9월 28일,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위해 택시를 타고 이스탄불 파티 지구에 있는 결혼등록소로 갔다. 결혼등록소에서는 카슈끄지에게 합법적으로 이혼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서류를 요구했는데, 이 서류는 사우디 영사관에 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간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손을 맞잡고 되돌아 나왔다.
이후 카슈끄지는 10월 2일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 야간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돌아와 아파트로 가서 첸기즈를 만났다. 그들은 12시쯤 택시를 타고 사우디 영사관으로 가면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카슈끄지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설마 사우디가 튀르키예에서까지 그를 해치려 들겠느냐고 말했다. 영사관 길 앞을 바리케이드가 막고 있었다. 카슈끄지는 그 앞에서 그녀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곧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사관은 4시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카슈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카슈끄지의 사생활과 실종 사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카슈끄지는 망명 생활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과 그의 가정 생활, 결혼, 그리고 실종 당시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카슈끄지는 여러 번의 결혼을 했으며, 워싱턴으로 탈출한 이후에는 알라 나시프와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슈끄지의 사우디 정부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나시프와의 관계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사우디에서 출국 금지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사태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이후 카슈끄지는 이스탄불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하티스 첸기즈라는 여성과 만났습니다. 그녀는 카슈끄지의 글을 좋아하고,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 시점에는 그들의 만남이 짧았기 때문에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을 계획하며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신고를 위해 영사관에 가던 중 카슈끄지는 영사관을 다녀오지 않고 실종되었습니다.
카슈끄지의 사생활, 그의 가정과 결혼, 그리고 사라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망명 생활과 정치적 활동에 따른 미래의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배경을 보여줍니다.
사우디 왕실과 왕세자 MBS(Mohammed bin Salman)의 정치적인 변화와 권력 행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는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사우디 왕실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MBS의 권력 확대에 따른 여러 상황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카슈끄지는 MBS의 방향성과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며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은 사우디 왕실 내부의 갈등과 MBS의 행동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MBS가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으며 권력을 어떻게 확대하려 했는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카슈끄지 살해 사건은 사우디 왕실 내부의 분노와 불안, 왕세자 MBS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왕과 다른 원로 왕자들은 MBS의 방식과 행동을 위험하게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MBS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높아져, 다른 왕자들이 맞서기 어렵다는 상황도 설명되고 있습니다.
MBS의 사상과 정책, 그리고 왕실 내부의 갈등과 권력 변화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사우디 아라비아의 현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후기
무함마드 빈 살만은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이뤄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다른 사람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가 그 그늘을 벗어난 후 정적을 제거하고, 사우디 정부의 중추 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확장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우디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물론 그렇게 올라서기까지 운도 따랐다. 그의 아버지 살만이 자기 형제들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면 국왕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국왕에 오른 후에도 다른 아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수 있었는데도 여섯 번째 아들인 데다가 아직 젊고 배경도 시원치 않고 문제아로 낙인찍힌 MBS를 선택한 것이다. 절대군주제란 본디 한 사람만을 위한 민주주의이고 MBS는 그 한 사람인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선택했을 때 MBS는 자신의 속성을 충분히 발휘해 스스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기업을 경영한 일도 없었으며, 군에 복무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왕국의 권력을 놓고 겨루는 경쟁자 사이에서 자기 강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일벌레였고 전략적이었으며, 기꺼이 전통을 깨뜨렸고, 때때로 누구보다 잔인해서 진정으로 마키아벨리다운 왕자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이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MBS는 국왕에 오를 것이고,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아버지 사후에 수십 년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무함마드 빈 살만이 다스리는 사우디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가? 그를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두 가지 원동력, 즉 권력 집중과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는 권력을 극단적으로 집중시켰으며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옹호해 왔다. MBS가 이끄는 사우디는 여성이 운전하고 일하고 여행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지만, 동시에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이성과 어울리고 창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지만, 정부 정책이 적절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반역으로 간주되는 나라가 되었다. 젊은 여성이 이전 세대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을 이루는 나라가 되었지만, 법을 준수하는 국민이 언론인이나 인권 단체와 이야기를 나누면 자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해야 할 나라가 되었다.
한편 사회 전반을 개혁하기 위해 MBS가 쏟은 노력은 놀랍다. 사우디의 인구 통계를 공개하고 오래된 규범을 깨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만약 그의 경쟁자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같은 정책을 펼쳤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사우디 젊은이들은 젊은 왕자가 내려주는 선물 덕택에 앞으로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우디가 당면한 경제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 역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것이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필요한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참고로 석유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 중에서 진정한 경제적 다각화를 이룬 나라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MBS가 마법 같은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사우디 인력을 정비하고, 전례 없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사우디가 경험이 부족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분야를 새롭게 일궈나가야 한다. 특히 저유가로 국가 지출이 제한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MBS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그를 따르는 사우디 젊은이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일 것이다. 매년 수십만 명이 고용 시장에 진입하는데, MBS가 어떻게 그들에게 필요한 일자리를 충분하게 만들어 낼 것이며, 그들이 지금과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영화관에 갈 수 있고 백스트리트 보이즈 노래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흥분하고 있지만, 앞으로 정부 예산이 빡빡해지고 취업도 어렵고 부모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도 더 적은 보수를 받는다면, 그들의 앞날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암울해지게 될 것이다.
MBS는 권력의 중심에 올라서면서 사우디의 권력 구조를 재편성했다. 왕실은 더 이상 원로 왕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기관도 아니고 독립적인 권한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군주제와 성직자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고리를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통치하고 난 후 국가의 권위는 종교적 정통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에 바탕을 두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성직자의 세력을 약화하려는 MBS의 노력이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물론 이런 노력으로 구태의연한 모습은 쉽게 사라지겠지만, 사우디가 오랫동안 국민을 과도한 보수 이데올로기에 몰아넣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중동 전역에서 사우디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 오고 있다. 외교력보다 힘을 앞세웠으며 심사숙고한 정책보다 도박을 앞세웠다. 레바논과 카타르와 예멘이 바로 이런 정책의 희생자였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MBS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란과 무슬림형제단에 맞설 경우 사우디의 이웃 국가들이나 해외 파트너들이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우디를 이스라엘과 얼마나 더 가깝게 만들지는 시간이 지나고 봐야 알겠지만, 그의 선대들이 팔레스타인을 동정적으로 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사후에 유대 국가와 조용한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 가속화될 수도 있다.
아무튼 그가 자신이 보여준 선의를 인정받고 싶다면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MBS가 예멘에서 승리를 얻어낼 가능성은 몇 년 전보다 더 작아졌다. 동시에 그의 휘하에 있는 사우디 공군이 예멘 민간인을 계속 살상하는 것 때문에 국민 여론이 산산조각이 나 다시 하나가 되기는 어려워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MBS가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후티가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지만 사우디가 피해에 무감각한 작전을 계속 펼치고 실패한 작전을 바로잡을 만한 능력도 없다 보니 결국 이란을 끌어들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촉발한 것이 아닌가.
무함마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의 정치적인 업적과 도전, 그리고 그가 사우디 아라비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은 사우디 왕실 내에서 중요한 위치로 올라선 인물로서, 그의 아버지의 선택과 다양한 정책을 통해 권력을 확장하고 국내외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글에서는 MBS의 개혁 정책과 그로 인한 사회 변화에 대한 양면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우디의 사회적·경제적 개혁으로 여성의 권리 향상과 경제 다각화, 더 많은 일자리 창출 등의 성과가 언급되지만, 동시에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과 제한된 민주주의, 인권 문제, 그리고 지속적인 외교적 갈등 등의 부정적인 측면도 다루고 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의 행동이 사우디 왕국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고 있으며 성직자와의 관계, 국제적인 입장 등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우디와 주변 국가들 간의 긴장이 높아지거나 예멘 내전과 같은 문제에 대한 책임도 놓치고 있지 않다는 내용도 나와있습니다.
MBS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함께 담고 있는데, 그가 당면한 도전과 그로 인한 사회 변화가 사우디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사우디의 권력 구조와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내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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