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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영화 개봉일 책 예매 뜻 줄거리 후기 원작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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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영화 개봉일 책 예매 뜻 줄거리 후기 원작 평전 

'오펜하이머'라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 개봉을 하루 앞두고 예매율 50%를 돌파하며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영화는 국내외에서 높은 예매율과 흥행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사전 예매량이 40만장을 돌파할 정도로 매우 높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글로벌 흥행 수익도 6억 달러를 넘어선 상황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탁월한 연출이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으로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예매율과 흥행 수익을 통해 여전히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관객들은 놀란 감독의 예술적인 연출과 흥미로운 스토리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이 작품을 불철주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펜하이머 개요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독일계 인물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입니다. 이 성씨는 독일 라인란트팔츠 지역의 오펜하임(Oppenheim)이라는 도시 출신을 의미합니다. 이 도시는 과거에는 유대인 정착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나치 홀로코스트 이전까지 유대계의 삶과 역사가 깃든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 '오펜하이머' 성씨는 유대계 성씨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미국의 물리학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점점 고조되는 시기에, 일본은 미국 함대를 놀라게 하는 진주만 공습을 통해 선제공격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승기를 거두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회담이 이루어졌지만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결국 핵무기가 실전 투입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펜하이머는 그의 작품으로 인한 책임과 고통을 느끼게 되었으며, 좌파 및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 시대 이후 소련의 스파이 혐의로 몰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모든 공직에서 해임당했습니다. 그 후 건강이 나빠지면서 후두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침내 2022년,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 혐의를 모두 벗고 완전히 무죄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양복 사업에 참여하여 성공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오펜하이머 가족은 상당한 부유함을 누렸습니다.

부모님의 교육 열정이 오펜하이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 다녔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의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통해 그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나 친족주의 문화에 크게 매료되지 않았다고 전해졌습니다.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의 취미는 광물 수집이었습니다. 광물의 성질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핵무기 개발에 영감을 주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의 빠른 학습 능력과 우수한 교육 배경 덕분에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922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하였고, 예외적으로 4년 과정을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완료하였습니다.

언어 역시 그의 능력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플라톤의 저작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네덜란드어도 1주일 만에 익힐 정도로 빠르게 습득했으며, 산스크리트어도 취미로 공부하여 힌두교 원전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유창한 언어 능력은 그 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I am become death..."라는 유명한 구절을 향한 언급도 남겼습니다. 이는 바가바드 기타에 기록된 말로, 나중에 핵무기와 관련하여 그의 내면적인 갈등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1924년에 학부 과정을 마친 후,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캐번디시 연구소는 맥스웰, 톰슨, 러더퍼드, 보어, 채드윅, 왓슨, 크릭 등의 대표적인 인물로 구성된 실험물리학 학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학풍은 오펜하이머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더퍼드와의 갈등도 있었으며, 톰슨의 주장에 따라 기초 물리학 실험 과목을 수강하는 조건으로 학교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학 중에 신경쇠약 및 우울증에 걸려 건강 문제를 겪었으며, 그 당시 지도교수였던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려는 사건 등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26년,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괴팅겐 대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이 전학은 닐스 보어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친 결정이었습니다. 괴팅겐 대학교는 페르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물리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인 양자역학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의 유창한 외국어 능력이 이곳에서 크게 도움을 줬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상대적으로 우울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했지만, 이론적인 측면에 더 중점을 둔 괴팅겐 대학교에서는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괴팅겐 대학교 시절 오펜하이머는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수업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끌어내리고 직접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괴팅겐 대학교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일부 인정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 생애인 케임브리지와 괴팅겐 시절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교수 생활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성격이 대단히 냉철하고 차분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통솔력,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UC 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평가를 받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도 매년 6주간 강의를 하면서 활약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UC 버클리에서 교수와 연구자로서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30년대 말에는 찬드라세카르 한계를 중성자 별에 적용하여 동료 학자들과 함께 이론적으로 차가운 중성자 별의 질량이 태양의 3배를 넘으면 중력 붕괴로 블랙홀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 결과는 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Tolmann-Oppenheimer-Volkoff Limit, TOV Limit)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에 UC 버클리 교수로 있던 실험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와 협력을 많이 했는데, 로런스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로 나중에 지명됨으로써 그들의 연결고리가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교수 시절에 대한 평가는 대인 관계가 서툴고 굉장함을 자랑하는 천재와 허식을 부리는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크게 양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생들은 대체로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대공황 시기에 퍼지던 좌파 사상에 그 역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러 좌파 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맥카시즘 시대에 그가 어려움을 겪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본인은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는 좌파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의 친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일시적으로 익명으로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였던 키티 또한 과거에 좌익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경험이 있었으며, 그녀의 전 남편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로 싸워 목숨을 잃는 등 과거를 통해 오펜하이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키티는 이후 오펜하이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과거는 오펜하이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오펜하이머가 진 태트록(1914~1944)이라는 애인을 만나기 전에 만났던 인물 역시 좌파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하다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이들과의 관계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과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프로젝트 직전에 그로브스와의 긍정적 평가와 함께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에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는 우라늄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조사하고 농축 우라늄 생산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육군이 이 프로젝트를 관리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때 애국심에 불타며 맨해튼 계획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 관련 계산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맨해튼 계획을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이미 원자폭탄 연구를 진행 중이던 3개의 연구소 외에도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새로운 연구소를 계획했습니다. 그로브스는 기존의 3개 연구소의 소장들(콤프턴, 로런스, 우레이)에게 새 연구소를 책임지도록 요청했지만, 그들은 이미 바쁜 상황이었기에 이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콤프턴은 자신 대신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큰 연구진을 이끄는 경력이 부족하며 공산주의 의혹도 받고 있었습니다. 미군 상급부는 오펜하이머를 영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로브스는 강행하였고,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에는 자신의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농장을 새 연구소의 위치로 제안하였으며, 결국 로스앨러모스가 선택되었습니다. 맨해튼 계획은 군사적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중령으로 임명되고 군대의 체력 검사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를 군의 위임을 받아 UC 버클리가 운영하는 연구 기관으로 변경하는 타협점을 찾아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최대 6천 명의 연구원을 설득하고, 미국은 개발한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일본을 포기하게 만들며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킵니다.

맨해튼 계획이 대중에 공개되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이 과학무기의 상징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핵무기 개발 중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 핵무기를 제안하였으며, 전술용 핵무기 개발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의 공격 계획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 정책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오펜하이머는 비밀정보 접근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이후 '오펜하이머 사건'이라 불리는 사태가 일어나며, 매카시즘에 휩쓸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과거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와의 관련에서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종전 이후 맨해튼 계획이 공개되면서, 오펜하이머는 언론에 노출되었고 핵무기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 직무를 포기하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돌아갔으며, 이후에도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무차별적인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 핵무기의 개발을 제안하고, 이

 분야에도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의 공격 계획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 정책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비밀정보 접근 권한을 박탈당했고, '오펜하이머 사건'이라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매카시즘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문제의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역할과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핵폭발의 파장을 목격한 후, 오펜하이머는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전해져 있습니다. 그 이후로 혼자서 백악관까지 가서 1인 시위를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핵무기에 대한 엄중한 고민과 도덕적인 고려를 경험했습니다. 어쨌든 핵 계획에서 멀어진 뒤, 그는 고등연구원으로서 고위 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AS)의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연구 분야에 관계없이 서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연구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도 함께라면 가능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고를 연구소에도 적용하고자 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연구 환경과 협업 문화의 혁신을 이끌어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단독으로 배급을 맡아 놀란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워너 브라더스와는 다른 배급사에서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개봉 전 정보

2021년 9월,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작품은 데드라인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덩케르크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놀란의 이 작품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극장에서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놀란의 작품 스타일에 맞추어 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이 HBO Max와 극장 동시 공개로 인해 워너 브라더스와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스튜디오들이 이 작품에 대한 각본을 검토하고 제작을 논의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배급사로는 유니버설 픽처스가 확정되었는데, 이는 유니버설의 CEO인 도나 랭글리의 성과와 창의성을 중시하는 스튜디오 정책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2021년 10월에 공개되었으며, "오펜하이머"로 결정되었습니다. 북미에서의 개봉일은 2023년 7월 21일로 확정되었으며, 이 작품은 카이 버드와 마틴 J. 셔윈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됩니다. 주요 배역으로는 킬리언 머피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촬영은 2022년 초에 시작되었으며, IMAX 65mm와 65mm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여 촬영되었습니다. 테넷에서 함께한 촬영감독 호이트 반 호이테마, 작곡가 루드비그 예란손, 편집자 제니퍼 레임이 이번 작품에서도 협업하였습니다.

작품의 출연진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에밀리 블런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아내인 캐서린 '키티' 오펜하이머 역으로 출연하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맷 데이먼은 각각 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루이스 스트로스와 맨해튼 계획을 지휘한 레슬리 그로브스 중장 역으로 출연합니다. 플로렌스 퓨, 라미 말렉, 조쉬 하트넷, 데인 드한 등의 배우들도 작품에 참여하며, 작품의 제작은 2022년 3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작품의 스틸 이미지가 2022년 2월 22일에 공개되었으며, 영화의 촬영은 이달 뉴멕시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사상 처음으로 아이맥스 흑백 아날로그로 촬영되었습니다. 작품의 배역은 다양한 배우들의 참여로 다채롭게 구성되었으며, 게리 올드만의 출연 소식 역시 발표되었습니다. 작품의 개봉을 앞두고 티저 예고편과 독점 영상 등이 북미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등장인물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연 및 조연 배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킬리언 머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
- 에밀리 블런트: 캐서린 '키티' 오펜하이머 역
- 맷 데이먼: 레슬리 그로브스 역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루이스 스트로스 역
- 베니 사프디: 에드워드 텔러 역
- 플로렌스 퓨: 진 태트록 역
- 라미 말렉: 데이비드 힐 역
- 조쉬 하트넷: 어니스트 로런스 역
- 데인 드한: 케네스 니콜스 역
- 잭 퀘이드: 리처드 파인만 역
- 매튜 모딘: 버니바 부시 역
- 딜런 아놀드: 프랭크 오펜하이머 역
- 올든 에런라이크: 에이드 상원의원 역
- 데이기드 크럼홀츠: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역
- 케네스 브래너: 닐스 보어 역
- 마이클 안가라노: 로버트 서버 역
- 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 윌리엄 보든 역
- 제이슨 클라크: 로저 롭 역
- 루이스 롬바드: 루스 톨먼 역
- 스콧 그라임스: 법률 고문 역
- 크리스토퍼 덴햄: 클라우스 푹스 역
- 제임스 다시: 패트릭 블래킷 역
- 데이비드 리스달: 도널드 호닉 역
- 가이 버넷: 조지 엘튼턴 역
- 조시 저커먼: 로시 로마니츠 역
- 대니 드페라리: 엔리코 페르미 역
- 조시 펙: 케네스 베인브리지 역
- 해리슨 길버트슨: 필립 모리슨 역
- 톰 젠킨스: 리차드 톨먼 역
- 올리 하스키비: 에드워드 콘던 역
- 에마 듀몬트: 재키 오펜하이머 역
- 마티아스 슈바이크회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역
- 구스타프 스카스가드: 한스 베테 역
- 데본 보스틱: 세스 네더마이어 역
- 알렉스 울프: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 역
- 토니 골드윈: 고든 그레이 역
- 게리 올드먼: 해리 S. 트루먼 역
- 올리비아 썰비: 릴리 호닉 역
- 케이시 애플렉: 보리스 역
- 톰 콘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

이 작품은 명배우들이 주연, 조연, 단역, 특별출연까지 모두 참여하여 초호화 캐스팅을 이루어냈다는 반응이 많이 나왔습니다.

오펜하이머 줄거리

이 영화는 두 번째 세계 대전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며, "덩케르크"와 같이 세 개의 시간대에서 진행됩니다. 이 세 시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젊은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에서 맨해튼 계획까지를 다루는 기본 시간대.

이 영화는 학창 시절부터 맨해튼 계획까지를 풀컬러로 묘사하며 시작합니다.

22살의 젊은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유학 시절 실험물리학을 공부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도교수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닐스 보어의 권유로 괴팅겐 대학교로 학적을 옮기게 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그곳에서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을 배우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칼텍과 UC 버클리에서 연구하며 실험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와 협업하게 되며, 진 태틀록과의 관계가 시작되고 캐서린과 결혼합니다. 두 여인은 공산주의자로서 오펜하이머도 미국 공산당과 교류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 레슬리 그로브스 장성이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로 임명하며 그의 삶은 큰 전환을 맞게 됩니다. 그로브스의 임명으로 오펜하이머는 국가 안보와의 관계를 위해 공산당과의 교류를 중단합니다. 그 결과로 맨해튼 계획은 계속되며 로스 앨러모스의 연구소를 설립하게 됩니다.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맨해튼 계획은 진행되고, 트리니티 실험을 통해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킵니다. 이것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오펜하이머의 인생의 정점이 됩니다.

그러나 원자탄에 대한 결정은 오펜하이머의 손을 벗어나게 되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이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며 원자탄에 대한 실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영화는 그의 삶과 선택, 그리고 역사적인 순간들을 풀컬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2.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가 벌어진 시간대.

1954년의 오펜하이머 청문회 장면은 빛바랜 색감으로 표현됩니다.

이 시점에서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수소폭탄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에 함께 일했던 에드워드 텔러와 의견이 갈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미국 공산당과의 교류와 얽혀져 정부의 의심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동안에, 원자력 위원회의 루이스 스트로스는 과거의 일로 인해 오펜하이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에게 공산주의자 및 스파이라는 비난을 씌워 원자력 분야에서의 명예를 훼손시킵니다. 텔러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불리한 진술을 하며 배신합니다. 이로 인해 함께 일했던 동료들 역시 둘로 나뉘게 되는데, 일부는 오펜하이머를 지지하며 도와주려 하지만, 대다수는 매카시즘 시대의 공포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된 이유가 두 가지로 나타나며, 그 중 일부는 영화적 창작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동위원소 논쟁으로, 이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 논쟁에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대립한 것은 사실이며, 나중에 소련의 핵 실험이 시작되면서도 스트로스의 주장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았던 의견이 나중에 실용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의심과 원한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복수 방법이 누명을 씌우는 가장 비현실적인 방식이었다는 점입니다.


3.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가 열렸던 시간대.

1959년의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 장면은 흑백으로 표현됩니다.

약 5년 후, 스트로스 본인도 상무부 장관 임명 청문회에서 당시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격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며 자멸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오펜하이머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되고, 행사에 참석한 에드워드 텔러와 화해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인 1963년 12월, 오펜하이머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받게 됩니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의 영향력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되며 영화에서의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오펜하이머와 에드워드 텔러의 화해도 이루어집니다.

영화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만남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인서트와 전환, 간결한 대사가 함께 조화를 이룬 명장면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으로 비난하는 현상에 분개하며, 오펜하이머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해하며 그의 선택을 비판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오펜하이머의 참담한 심정과 자괴감이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모든 성취의 결과에 직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세상이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영광과 상을 수여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와 함께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죄책감과 자아비하에 심려하는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는 여전히 핵무기로 인한 위협에 시달리며, 화면에 수없이 많은 핵무기가 퍼지는 모습을 통해 그의 내면적 고통과 모순을 묘사하여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이러한 시간대들은 시간 순서에 따라 재구성되어 아래와 같이 전개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컬러 파트인 'Fission(핵분열)'과 스트로스의 관점을 흑백 파트인 'Fusion(핵융합)'이라는 제목으로 번갈아가며 펼쳐집니다. 'Fission' 파트는 원자폭탄의 원리를 통해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계획을 통해 원자폭탄의 개발에 관여하며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Fusion' 파트는 수소폭탄의 원리를 배경으로 오펜하이머의 수소폭탄 개발 반대와 매카시즘과 스트로스의 희생을 통해 몰락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목은 각 파트가 담고 있는 내용과 의미를 반영하며, 영화는 마치 메멘토처럼 두 개의 파트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형태로 펼쳐집니다.

역사 재현

"오펜하이머"은 킬리안 머피가 주인공 오펜하이머 역으로 연기한 작품으로, 감독 놀란의 각본에 따라 처음으로 1인칭 시점으로 촬영된 영화입니다. 킬리안 머피의 연기와 영화의 스토리 구성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뒤 미국에서 교직을 시작했으며, 이 부분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을 연구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으며, 미국에서도 성공적인 학문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외모와 행동이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을 주도하여 핵폭탄의 연구와 개발에 큰 역할을 했으며, 카리스마와 조직력을 통해 학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성공을 이끌어냈습니다. 그와 함께 에드워드 텔러와의 관계와 오펜하이머의 인간성도 묘사되었습니다.

라비 박사는 오펜하이머의 가까운 친구로 묘사되며, 영화에서는 그의 역할과 인물적인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트리니티 핵실험에서의 장면도 영화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트리니티 실험에서의 폭발력에 대한 예측과 실제 측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청문회와 라비 박사의 옹호에 대한 내용도 다뤄지며, 이는 역사적 사건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부분입니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비밀 취급 인가 등급을 취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미 원자력 위원회(AEC)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조언을 받기 싫다면, 그의 의견을 무시하면 되지 않을까요? 간단한 일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불필요한 절차를 만들고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오펜하이머 박사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핵 분열 원자폭탄과 일련의 슈퍼 폭탄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나요? 무슨 다른 개발을 원하시는 건가요? 인어공주라도 개발해서 제시하라는 건가요?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이런 청문회가 마련되다니, 정말로 잘못된 처사입니다." -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박사,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항의한 발언 중 -

"한 사람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데 그가 조국에 봉사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애국자인지 소련 스파이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이유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면, 먼저 나부터 재판대에 올려봐야 합니다. 저도 때로는 다수의 의견과 달리 좀 덜 인기 있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 사람을 향해 오명을 씌우려 든다면,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은 없을 것입니다." - 버니바 부시 박사,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한 발언 중 -

실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자신의 과거 행적이 공개되면 어떤 심적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를 품게 되었습니다. 과거 오펜하이머와 관련된 사건 중에는 진 태트록과의 열애, 결혼 후의 불륜, 아내 키티 오펜하이머의 과거 공산당 가입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공개되면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라비 박사는 그의 친구를 보호하고자 힘썼습니다.

이를 위해 라비 박사는 청문회를 방지하려 애썼고, 협상안을 제안했습니다. 협상안에는 오펜하이머가 미 원자력 위원회 상임 고문직을 사퇴하고 과거 행적에 대한 공개 사과를 포함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미 원자력 위원회는 협상안을 거부하고 청문회를 강행했습니다. 스트로스와 원자력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해 오펜하이머를 굴욕시키고 압박하려는 개인적인 동기로 인해 협상을 거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따라 협상안을 수용하였고, 라비 박사는 스트로스에게 가서 오펜하이머 청문회만 막아주면 사실상 항복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트로스와 원자력 위원회는 이를 거부하고 청문회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비 박사는 무력감과 동시에 친구를 보호하지 못한 무력함을 느꼈던 것으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에드워드 텔러의 증언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지만, 텔러의 증언 내용을 통해 오펜하이머에게 대놓고 배신하는 행위는 사실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텔러를 지지하고 팀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키티 오펜하이머와 텔러의 악수 거부, 릴리 호닉의 역할 등도 영화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기반으로 영화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과 원자폭탄의 제조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릴리 호닉은 페미니스트로서 핵무기 연구에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여성의 권리와 인권 문제를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오펜하이머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만남은 영화에서 다룬 것처럼 오펜하이머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도 이 만남은 트루먼 대통령의 인상을 나쁘게 했습니다. 오펜하이머와 닐스 보어의 관계와 보어의 탈출은 영화와 실제 사건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들의 관계와 대화가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보어의 행적과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그로브스 장군과 미군 당국은 의심과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나오는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의 재현을 두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성조기의 디자인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는데, 현재 디자인은 적백 가로줄 13줄과 좌측 상단 파란 바탕에 50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미 합중국의 초기 13개 주와 현재의 50개 주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1930년에서 1954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하는 배경에 맞게 48개의 별이 그려진 성조기가 사용되었으며, 그 이유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아직 미국의 정식 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될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팻 맨"이 미 육군 군용트럭으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를 떠날 때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두 원자폭탄은 핵무기로서의 중요한 부분들이 분리되어 운반되었고, 로스 앨러모스를 떠날 때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트리니티 실험 이전에는 이미 원자폭탄의 일부 부품들이 티니안 섬 기지로 운반되어 있었지만 최종 조립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핵폭탄을 트럭으로 운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핵무기의 부품들은 매우 엄격한 보안 절차를 거쳐 운반되었습니다. 원자폭탄의 중요 부품들은 따로 분리되어 운반되며, 특히 핵료인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은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보잉 B-29 수퍼포트리스 폭격기를 타고 트리니티 실험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 비행기의 외관은 B-29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표현된 환영과 논란이 있는 장면들은 오펜하이머의 상상과 현실적인 과학적 사실과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V2 로켓의 화염이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화가 과학적으로 고증되어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V2 로켓은 실제로 액화산소와 알콜/물 혼합재를 사용하여 추진되었으며, 높은 고도에서 푸른 화염이 관측될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와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사이의 정보구획화에 대한 의견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정보구획화는 미 핵무기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정보구획화가 완벽하게 기능하지 않아 소련에게 핵무기 기술이 유출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는 장면이 나오며, 이는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를 기념하고 그에게 수여되는 상입니다.

오펜하이머은 엔리코 페르미상의 전년도 수상자 에드워드 텔러였습니다.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존 F. 케네디 정권은 공화당과의 갈등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케네디 정권은 메카시즘의 광기어린 시기를 벗어나고는 있었지만 극우 반공 세력의 영향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케네디 정부는 오펜하이머가 페르미상을 받는다면 백악관에서 직접 수여식을 열어보는 것을 제안하며 공화당의 반응을 조사했습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오펜하이머의 수상이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화당에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페르미상 수상은 공화당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과거 공산주의 연루와 관련된 정보 문서들을 들고 나서기까지도 했습니다. 미 공화당은 오펜하이머의 페르미상 수상을 이용해 그의 신뢰성을 저해하려고 애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주당 정부는 공화당의 압력에 굴복하며 페르미상의 상금을 반으로 깎아 2만 5천달러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갈등은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미 정치권은 오펜하이머에게 사과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복권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의 이름이 빛나는 한 페르미상을 수여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오히려 그 상의 권위마저도 정치적인 이유로 훼손되었습니다.

미 에너지부는 2022년에 들어와서야 오펜하이머의 기밀 정보 취급 인가를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정치적인 압력과 갈등으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이미 정부의 공식 프로젝트나 국가 사업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가족은 불행과 비극을 겪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는 사후 5년 뒤에, 그의 딸 토니는 뉴욕의 별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애국적인 가치를 추구했으나 정치적인 갈등과 의혹으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과 별개로 정치적인 갈등과 불운한 가족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평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킬리언 머피의 탁월한 연기와 아름다운 시각 효과로 관객을 사로잡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는 93%이며 관객 점수는 91%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메타크리틱의 메타스코어는 88점이며 유저 점수는 8.9점으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탁월한 연기와 놀란의 연출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핵폭발 장면의 연출은 특히 칭찬받으며, 과학자들의 긴장과 부담감을 몰입감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폭발 장면에 있어서 CG를 배제하고 연출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음악은 전통적인 놀란 스타일로 압도적인 오케스트라와 음량을 활용하여 긴장감을 높였다고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음량이 매우 높아 귀에 아픔을 유발할 수 있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전체적으로 '오펜하이머'는 탁월한 연기진과 놀란의 연출로 구성된 작품으로, 핵폭발과 연구과정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낸 것이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평론가는 오펜하이머의 개인사와 초기 생애에 관련한 내용이 영화의 리듬을 약간 방해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감독력과 킬리언 머피의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여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제작 시 CG 사용을 최소화하고 실제 촬영을 선호하는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그의 최신 작품 '오펜하이머' 역시 이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프로젝트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핵무기 실험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을 위해서 실제 핵실험이나 폭발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래식 폭약 등을 사용하여 비슷한 폭발 효과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주요 역할 중 하나인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는 이 영화가 그의 첫 주연 작품이며, 이전에는 조연 역할로 참여했던 배우입니다. 마이클 케인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에서 빠짐없이 출연한 배우로, 이번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의 출연 기록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흑백 장면과 컬러 장면이 병행되어 사용되며, 이를 통해 실제 역사와 오펜하이머의 관점을 구분하여 표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놀란 감독은 이러한 색상의 사용을 통해 시간과 주관, 객관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필름 상영을 고집하는 놀란 감독의 성향과 아이맥스 필름 촬영의 특징으로 인해 음향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작가성과 기술적 제약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지적되었습니다. 아이맥스 필름 촬영 시 카메라 소음 등 기술적 한계로 인해 음향 믹싱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작품의 일부 장면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국가별로 다른 버전이 제작되기도 했는데, 이는 벌거벗은 장면이나 일부 민감한 내용 등에 대한 수정을 포함합니다.

 '오펜하이머'가 2023년 화요일에 개봉될 예정이며, 이에 대한 개봉 날짜 변경의 이유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음향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은 음향에 대한 논란이 자주 발생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음향 문제는 작가적 성향과 기술적 제약 사이의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