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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 리커창 총리 중국 사망 심장마비 병 돌연 사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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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 리커창 총리 중국 사망 심장마비 병 돌연 사망 별세 

리커창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지난 3월 퇴임한 뒤, 27일에 사망했다는 중국 CCTV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68세였습니다.


CCTV는 "리커창 동지는 26일 갑자기 심장병 발작을 겪었으며, 27일 0시 10분에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라고 전했으며 "부고 소식은 곧 발표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리 전 총리는 1955년생으로,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의 두각 중 한 명으로, 중국공산당 내 공청단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공청단의 제1서기, 허난성 당위원회 서기, 랴오닝성 당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한 뒤, 2007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리 전 총리는 처음에 공청단 1서기를 지났고,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후 전 주석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 정부에서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1998년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허난성 성장에 임명되어 행정 경험을 쌓았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랴오닝성 서기로 근무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리커창은 대내외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차기 국가주석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리 전 총리는 '흙수저' 출신으로 알려져 있어, 시진핑 국가주석과는 다르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인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와 시 주석은 최고 지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2007년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은 서열 6위 부주석에, 리커창은 서열 7위 부총리에 올라가며 후계 구도가 정리되었습니다. 

이때 상하이방을 이끄는 장쩌민 전 주석과 후 전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 간의 파벌 싸움이 치열했고, 혁명 원로 자제 그룹인 태자당은 시 주석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영향을 끼쳤습니다.

리 전 총리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공청단 출신으로, 같은 파벌인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시기인 2008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2013년에 시진핑 주석이 취임한 이후 10년 동안 국무원 총리 자리, 즉 중국의 2인자 자리를 맡아왔습니다.

리 전 총리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공청단 파벌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시기인 2008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로 활동했습니다.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기 전에는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 서기와 함께 후진타오 주석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혁명 원로 자제 그룹인 태자당과 장쩌민파인 상하이방이 연합하여 차기 지도자로 시진핑 주석을 지지하면서, 리 전 총리는 사실상 권력 경쟁에서 밀려났습니다.

리 총리는 중국 내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동료들 중 가장 먼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2008년 후진타오 국가주석 시기부터 국무원 부총리로 활동하며 중국 정치 무대에서 활발한 역할을 했습니다.


2013년에는 중국 총리로 임명되어, 태자당 출신으로 국가주석에 오른 시 주석과는 달리 엘리트 경로를 거쳐 총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 정치적 권력이 시 주석에 집중되면서 총리의 권한이 점차 제한되었고, 경제와 내치 관련 분야에서의 권한을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리 전 총리는 그의 임기 동안 정부 부채 문제, 미국과의 무역 긴장, 그리고 코로나19 대응과 같은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주력하여 대응했으나, 중국의 시 주석 체제에서 집단 지도 시스템이 약화되면서, 리 전 총리의 영향력이 제한되었으며, 한때 시 주석의 경쟁자로 여겨졌던 그는 사실상 운신의 폭이 좁았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4월 중국이 제로 코로나 방침 일환으로 상하이를 폐쇄하려고 할 때, 리 전 총리는 "과도한 방역으로 물류가 차질을 빚고, 농업 인력과 농자재 이동 통제로 곡물 수확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발언이 실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리 전 총리의 활동은 현지 언론에서는 3월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로는 보도되지 않았으며, 관련 내용은 현지 매체나 소셜 미디어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94년 한중수교 2년 뒤, 공청단 제1서기로 활동하던 당시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어서 2006년에는 랴오닝성 당서기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되어, 남한과 북한을 연이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강조되던 시기에, 리 전 총리는 공개적으로 "방역 지상주의가 경제를 해치면 안 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2020년 5월에는 "중국에서 6억 명의 월 평균 소득이 1000위안(약 18만 원)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며 노점상 활성화를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시 주석은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 전 총리의 발언은 시 주석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리 총리는 지난 해에는 중국 경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언급하여 '우한 경제는 코로나 이전보다 나빠졌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중국의 경제 정책 방향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현재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는 리 전 총리에 관한 백과사전 페이지를 흑백으로 변경하였고, 중국의 국민 메신저인 위챗(WeChat)에서는 '리커창'이라는 단어의 전송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해당 날에 중국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웨이보에는 "인민의 좋은 총리, 인민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와 같은 수십만 건의 추모 글이 게시되었습니다. 

어떤 누리꾼들은 중국의 트위터와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위챗에서 "중국의 자유주의 시장 경제 개혁의 등대였다"며 "갑자기 등대가 꺼짐에 따라 자유주의 시장 경제 개혁이 끝났다"고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습니다.